염색할 때가 되었는지 흰머리가 쑤욱 올라와 있다.
얼굴에 주름은 없는데 흰머리가 십년은 늙어보이게 만든다.
한달에 한번, 요즘은 한달이 되기 전에 머리 염색을 하게된다
건강을 생각해 천연 염색제인 헤나를 이용하다보니 시간이 많이 걸리고 번거롭다.
귀찮지만 염색 전후가 달라지니 아직 포기할 수가 없다
이년 전 한국에 다녀온 이후 폭삭폭삭 늙어감을 느끼게 된다
그때가 나의 마지막 전성기기가 아니었나 싶다
은퇴를 하고 일을 하지 않아 긴장감이 풀린 생활을 해서일까
딸은 아빠가 은퇴후 갑자기 늙은 것같다고 했었다
나는 갑자기는 아니지만 나날이 늙어가는 기분이다
은퇴후 매일 걸으면서 건강을 챙겨 당화혈색소도 내려가고
약을 착실히 먹어서인지 혈압, 콜레스테롤도 정상으로 돌아오고
심장도 좋아졌는데
거기까지가 한계인지 더 이상 좋아지지는 않는다
쉽게 몸이 무거워지고 피곤하다
조금만 운동을 소홀히 하거나 음식조절을 하지 않으면 금방 도로아미가 될 것같다
가끔식 손녀를 돌보아주며 노후 생활을 보내는 것도 좋지만
장기적으로 집중할 무엇인가를 하고 싶은데 그 무엇을 찾지 못했고 어떤 동기유발이 되지 않는다
유튜브에서 '한국이 싫어서' 라는 영화의 예고편을 보았는데
한 젊은이의 한국을 떠나는 여러가지 이유가 나온다.
여러가지 이유로 한국을 떠나고 싶어하는 젊은이들이 있는 만큼
여러가지 이유로 자기 나라를 떠나 한국에 살러 오는 젊은이들도 있다
역마살도 없는 난 왜 여기에 살고 있는 것일까
나는 어릴때부터 외국에 나가 살고 싶은 동경이 있었다
외국에 대한 동경도 있었지만
숨막힐듯한 가부장적인 집안의 억압과 차별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살고 싶은 욕망이 컸었던 것같다
나도 여동생도 일찍 결혼한 이유 중 하나가 집안에서 탈출이었다
그때는 집을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이 결혼밖에 없었던 것같다
다행인지 나도 여동생도 남편이 해외 주재원으로 나가게 되어 일찍 해외 생활 경험을 하게 되었고
해외생활의 경험은 이민으로 이어지게 된 것같다
재작년 딸의 결혼식을 위한 한국 방문은 남편은 이민후 21년만의 첫 방문이었고
나는 16년만의 두 번째 방문이었다.
아버지가 살아계셨다면 더 자주 갔었을지도 모르겠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나 남편이나 친정과 시댁에서 우리를 배척하는 사람들만 남아있는 곳에 그리움은 없었고
그곳을 찾을 이유가 없었다
우리가 한국을 떠난 이유는 그들때문이 아닌가 싶다
그들과 멀리 떨어져 살고 싶다는 것
한국이 싫어서가 아니라 그들이 싫어서
유튜브를 통해 해외 입양간 입양아의 이야기를 듣는다
부모가 돌아가셔서, 가난때문에, 길을 잃거나,버림을 받아서, 불륜으로 태어나,
유괴와 납치까지 다양한 이유로 해외 입양을 가서 마음의 상처를 안고 산다.
내가 국민학교 저학년때 병을 앓던 큰외삼촌이 외숙모와 이혼을 하고
두분 사이에 태어난 갓난 남자아이는 미국으로 해외 입양을 보냈다고 들었다
외삼촌과 이혼한 외숙모는 군인인 분과 재혼을 했다고 들었다
다복한 가정을 꾸리고 행복하게 살고 계실 것같다
그때가 1960년대였으니 그 아이는 지금 50대 중 후반이 되었을 것같다
잘 자라서 잘 살고 있을까?
엄마를 비롯한 외가 사람들에게는 이기적이고 차갑고 냉정한 비정함이 있는 것같다
특히 외할머니와 엄마를 비롯한 이모들이 그렇다
외할머니는 그렇게 소중했던 큰아들의 첫 손자를 어떻게 미국에 해외입양을 보낼수 있었을까
외할아버지와 외삼촌들에게는 따뜻함과 정이 느껴진다
둘째 외삼촌은 태어날때부터 눈이 이상했다고 한다
완벽하지 못했던 둘째 외삼촌은 외가에서 부끄러운 존재였고 숨기고 싶은 존재였고
미움과 소외와 왕따를 당하며 살았다
제대로 자라지 못하니 항상 문제를 일으켜 엄마의 욕바가지를 들었다
너때문에 내가 시댁에서 남편에게 대접을 받지 못하고 무시당하고 산다며 때리고 욕하고.
모자라고 부족한 형제를 사랑으로 보듬지 못하고 자기 입장만 생각한다.
집안에서 소외받고 떠돌며 살던 그 외삼촌은 20대에 어디에선가 외롭게 객사를 했다
엄마의 부탁이었는지 그 외삼촌에 끌려 방학에 기차를 타고 강릉에 가기도 했었다
그 외삼촌은 나를 조부모님댁에 데려다주지 않고 외가집에 먼저 데려갔다
외갓집에 가면 나와 한살 차이나는 막내 외삼촌이 있었고
방학에 집에 내려와 있는 쌀쌀맞고 새초롬한 막내이모가 있었고
잘생긴 막내외삼촌을 따르던 나와 같은 나이의 이종사촌이 놀러와 있었다
외가집에 먼저 가면 내 또래가 없는 조부모님댁에 가지 않으려해
조부모님댁에서 몇번씩 사람을 보내 나를 데리러 왔었다
조부모님댁에서 외갓집 가는 길에는 작은 골목길이 있었고 골목길이 끝나는 곳에
작은 대로?가 나오고 길을 건너면 중앙시장이었고
중앙시장 넘어 남대천을 건너 외갓집으로 갔었다
외가집에 머물던 나를 둘째 외삼촌이 조부모님댁으로 데려다 준 기억도 난다.
그러면 가는 길에 골목길에 있던 작은 단팥죽집에서 찐빵과 단팥죽을 사주었다
집안에서 소외와 왕따를 당하며 살던 둘째 외삼촌이
같은 처지인 나에게 동병 상련의 마음을 느껶던 것이 아니었을까
하지만 나는 둘째외삼촌처럼 불행하고 비참해지고 싶지 않았다
그것은 스스로를 소중히 여기고 아끼는 마음이 있고 없고의 차이 아니었을까
내가 아직 국민학교에 다니고 있을때 엄마가 나에게 그런 질문을 한 적이 있다
미국에 아버지 친구분이 계시는데 내가 가면 먹여 주고 재워주고 학교공부도 시켜주니 가겠냐고.
철없던 나는 아버지 친구집이라니 믿음이 갔고 미국에 대한 동경심으로 가겠다고 했었다
그 어린 나이에도 그 지옥같은 집을 떠나고 싶은 마음이 있었나보다
부모와 헤어지는 것에 대한 슬픔은 생각하지 않았다
아버지 친구분집이니 언제든 다시 만날수 있을거라 생각했었던 것같다
언제 가게될까 기대를 했었는데
나는 보내지지 않았다
아버지가 반대를 하지 않으셨을까 싶다
어린 마음에 내가 미국에 가서 오빠보다 더 잘 될 것같아서 안보내주나 생각했었다
지금 생각해보니 나를 해외입양보낼 마음으로 그런 질문을 한 것같다
내가 엄마가 둘인 팔자라 아버지가 바람을 피운다고 내가 맡이 노릇을 해야해서 오빠가 아프다고
내가 결혼하면 집안의 재산이 반이나 없어진다고
점을 믿고 사는 엄마에게 나는 엄마의 모든 불행의 원인이 되는 존재라
어떤 방법으로든 없애고 싶었나보다
어떻게 자신이 낳은 딸에게 그렇게 잔인할수 있었는지
방학때마다 한달내내 조부모님댁에 가 있게 되는 것은 사남매 중 나 뿐이었다
내가 결혼하고 남편따라 미국에 가게 되었을때
아버지는 딸과 헤어지는 것이 슬퍼 눈물을 흘리시는데 엄마는 너무나 기뻐하고 좋아했었다
엄마의 차별과 미움을 받으면서도 늘 엄마편을 들었던 내가 이민을 가게되었을때도 너무나 좋아했었다
이제는 멀리 떨어져 살아 볼일이 없다
내가 미국에 입양을 갔다면 잘 살았을까?
어쩌면 야무지게 잘 살았을지도
친정에서 살았을때보다 행복했을지도 모르겠다
가난하지 않는 멀쩡한 집안의 딸도 별별 이유로 입양아가 될 수 있었던 것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