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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2월 16일

집에 있으면서 영어를 사용하지 않으니 영어가 초기화 되는 것같다.

다시 직장 생활을 할 마음이 아직 없으니 언제 영어를 사용하게 될지 모르겠다 

가족외의 사람들과의 접촉도 거의 없고 쇼핑도 거의 하지 않고

코스코에 가 장을 볼 때도 영어를 사용할 일이 거의 없다.

어릴때 나의 성격은 밝고 사교적이었다.

대가족 속에서 많은 사람들과 접촉하며 살아서 그랬던 것같다

그런데 사춘기에 접어들면서 그 많은 대가족으로인해 

사람들이 싫어지고 나를 소심하게 안으로 숨어들게 만들었다

아버지는 외아들로 자라셔서 외로움이 많아서 그러신지

어른이 되어서도 죽을 때까지 친구들이 많으셨고 사람들에 둘러싸여 사셨다

밖에서 친구분들과 만나 일 차를 하시면 이 차나 삼 차는 집으로 손님들을 모시고 와 마무리를 하셨다

엄마는 거의 매일 아버지 술안주로 무얼 대접해야할지 골머리를 앓으셨다

내가 알 수 있는 남자의 기준이 아버지라

나도 결혼하면 남편이 집에 손님들을 데리고와 술상을 봐야 하는 줄 알았다

아버지는 여자는 요리를 잘해야 한다며 나를 결혼 전에 요리학원에 보내셨다 

아는 사람없는 도움 받을 사람 하나 없는 미국에 가서 요리학원의 경험은 많은 도움이 되었다 

결혼후 남편의 손님맞을 준비를 다 했는데 

남편은 아버지처럼 손님을 집에 데려오지 않았다

미국에 있을 땐 출장 온 손님들, 새로 오거나 가시는 주재원 가족을 위한 식사외에 특별한 손님 접대가 없었다

한국에 와서는 아이들 돌 때외에는 손님 접대가 없었다

시댁 친척분들도 멀리 살아

우리집 제사 때,

수원에 사는, 작은 아버지 양자로 간 시동생네의 명절 제사에 서로 참여 하는 것외의 

사람들과의 접촉이 없다  

남편과 살면서 느낀 것은 남편은 스스로도 스스로를 고립시켜며 살지만

나도 자기처럼 고립을 시키는 것이다

90년대 교통이 불편했던 의정부에 가서 살면서 강남에 사는 친정과 거리가 더 멀어졌고

서울에 사는 친구들과의 거리도 멀어졌다

나를 고립시키는 것에 많이 저항을 했지만

그것에 익숙해졌는지 지금 나는 나를 고립시키고 사는 것같다

아이들이 유치원과 학교를 간 사이 교회 활동을 하며 많은 사람들과 만나며 사회활동을 하고

미국생활의 경험으로 한국 전통문화에 관심이 생겨 한복 만들기, 자수, 궁중음식, 전통술 등을 배우러 다녔다

그런데 너무 어려운 것들을 배우러 다니다 보니 제대로 남아 있는 것이 없는 것같다

그냥 배우는 그 자체를 좋아했던 것같다 

미국에서도 아이없이 시간 보내는 것이 아까워

이년제 패션 스쿨에 다녔었다

그 학교는 내가 한국에 돌아 올때 4년제가 되어 내가 원하면 더 다닐 수가 있었는데

한국에 오게 되어 어소시에트만 받고 돌아왔다 

시카고에서는 알아주는 패션 스쿨이었지만 한국에는 알려지지 않아

연줄을 위해 다닌 한국의 패션 학원에선 왠 잡소리를 하나 했었던 것같다

그때 신문 광고를 보고 청바지 회사에 취업을 했는데

20대 초반의 아이들을 디자이너로 채용을 하고

서른이었던 나를 할머니 취급을 하고 그 당시 문을 연 코엑스 전시관에서 혼자 일하게 되었다

텅텅 빈 전시관의 한 방에서 혼자 하는 일 없이 하루를 보냈었다

그때 큰 아이를 갖게 되어 임신을 핑게로 그만 두었지만 

남편도 막상 내가 취업후 회사 사람들과 저녁 회식을 하고 자기보다 늦게 들어오는 것을 싫어했고

항상 그만 두라고 종용을 했다

한국에서의 취업은 항상 같은 모양이다

연줄을 통해 취업을 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누구의 누구라는 것이 알려지는 것이 일하는데 불편할 것같았고

그것때문에 실제보다 저평가 되거나 고평가 되는 것이 싫었었던 것같다

무엇보다 그들의 신세를 지게 되는 것이 싫었었다

그로인해 나는 그들의 마리오네뜨가 될 것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