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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3월 20일 수요일

최후의 만찬을 즐기듯 보너스로 찾아온 3월의 마지막 따뜻하고? 화창한 봄날을 즐기며 

어제 버나비 레이크를 걸었다.

집에서 버나비 레이크까지는 걸어서 10분에서 15분 사이쯤 걸린다.

버나비 레이크 전체를 걸으려면 내 걸음으로 넉넉히 세 시간 정도 걸리는데

나의 컨디션이 좋고 길에 익숙해지면 두 시간 반까지도 가능할 것같다

혼자서는 엄두가 나지 않아 오리들이 있는 곳까지만 가는데

그곳까지 다녀오면 집에서 왕복 한 시간에서 한 시간 반쯤 걸리는 것같다

집에서 오리들이 있는 곳까지 가면 몸의 컨디션이 좋아 더 걸을 수 있을 것같은데

거기까지가 딱 맞다.

몸의 컨디션이 좋다고 더 걸으면 돌아 올 때 힘이 든다.

엄마 아버지는 영화배우를 해도 충분할 만큼 키도 크시고 미남 미녀셨다

엄마는 대학교에서 공부하는 아버지를 따라 서울에 올라 오셨을때 대학에 다니고 싶어하셨는데

꿈을 실현하지 못하셨다

이화여대는 엄마가 다니고 싶어하던 학교였는데 다니지 못하셨다

이미 결혼하여 아이가 있기도 했고 대학교에 다닐 여유를 갖지 못하셨던 것같다

엄마가 거리에 걸으면 엄마가 유부녀인줄 모르고 따라오는 남학생들도 많았다고 했다

이화여대는 여자들에게 꿈의 대학이기도 했다

고등학교때 선생님이 서울대를 가라고 했었는데

이화여대를 가고 싶어 이화여대를 지망했다 떨어졌었다

서울대를 갈 실력이니 이화여대를 가면 붙을 줄 알았다

대학마다 입시 요강이 달랐고 교수 레슨도 하지 않았고 인맥도 없는 대학에 지원을 한 결과는 낙방이었다.

엄마는 내가 이화여대에 시험을 보러가는 것조차 부러워 하셨다

지금 후회가 되는 것은 왜 서울대를 가지 않았던가 하는 것이다

엄마가 점을 보았는데 내가 서울대를 가면 붙는데 다른 대학에 가면 떨어진다고 했단다

그 얘기를 왜 학교를 지원하기 전에 해주지 않았을까

재수를하면서 아버지는 아버지가 나온 대학을 추천하셨다

나도 그 대학이 싫었지만 재수를 하면서 마음이 약해진 나는 아버지를 믿고 그 대학에 시험을 보았다

그런데 듣도 보지 못한 그 대학에 붙어있는무슨 초대에 입학에 되어 있었다

3 수는 하지 못하겠고 그 대학이라도 다니지 않으면 대학에 다닐 기회조차 없을 것같아

꾹 참고 다녔다

대학에 가지 못한 엄마나 친척들은 그 대학이라도 다니는 나를 부러워했지만

남친이나 친구들은 얼마나 공부를 못했으면 그 대학을 다니냐고 무시를 했다

초대는 그 학교에 붙어 있어 그 학교 학생들과 교수님들, 수업을 공유했지만 왕따의 대상이었다

그런 학교의 서클에 들어가는 대신

학교 신문에 난 대학생 연합 써클에 들어 갔을 때도 초대 출신은 처음이라 왕따를 당했었다

좋은 대학에 가지 못한 나에게 부모의 지원은 없었다

내게 주어진 것은 차비와 점심값 정도여서 집과 학교만 왔다 갔다 하며 다녔다

먹고 마시고 노는데 필요한 돈은 없었다

나는 먹고 마시고 놀 줄 몰라 그 돈이 절실히 필요하지도 않아 

청바지와 티셔츠만 입은 채로 학교를 다녔다

좋은 대학에 들어가지 못했다고 아무것도 해주지 않아

초대 입학식에 초등학생인 여동생의 겨울 코트를 빌려입고 갔었다

엄마는 대학에 다니는 나를 부러워했지만 나의 대학 생활은 비참했었다

초대를 졸업하고 학부 3학년에 편입을 했지만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초대 1학년 2학기에 부산에서 열명 정도 되는 학생들이 초대에 편입을 왔었다

그 아이들은 이학년에 되면서 모두 학부로 편입을 해갔다

3학년에 그들을 다시 만났지만 좋은 옷을 입고 미팅을 하러 다니는 그들과 친구가 되지 못했다

1학년부터 다닌 아이들, 2학년에 편입한 아이들, 그리고 3학년에 편입한 초대 출신 두 명

모두 어울리지 못하는 관계였다

그래서 나는 대학 동창이 한 명밖에 없다

그 친구는 1학년부터 다녔지만 시골 출신이라 같은과 여학생들과 어울리지 못하다 3학년에 나와 친해졌다

그런데 지금은 1학년때부터 같이 다니던 여학생들과 친해진 모양이다

재작년 한국에 갔을 때 그 친구들과 자주 만난다고 했다

오빠와 나에 대한 실패탓인지 나에 대한 대항마를 만들려고 했는지

엄마는 나보다 여섯살 어린 여동생에게 정성을 쏟았다

여동생이 고등학교때 학교가 집에서 멀다고 여동생을 학교 근처에 하숙을 시키고 과외를 시키고

여동생을 반장을 만들며 오빠때처럼 치마바람을 피웠다

여동생도 이화여대를 시험봤다 떨어지고 재수를 해서 고대 영문과에 들어갔다

여동생이 일학년때인가 미국에서 지사원 생활을 하다 한국에 한번 귀국한 적이 있는데

동생의 옷장엔 좋은 옷들이 있었다 

나는 엄마의 차별에 익숙해 

동생이 좋은 대학에 간 것도 자랑스럽고 좋은 옷을 해준 것에 질투가 나지 않았다 

그럼에도 엄마는 나와 형제 자매 사이를 이간을 한다

그렇게 사이가 좋았던 엄마와 여동생도 몇년 전 무슨 일로 싸우고 연락을 끊었다고 한다

엄마가 우리가 어릴때 점쟁이가 딸들이 나중에 친정과 연을 끊는다고 했다고 했었는데

딸들이 연을 끊기 전에 엄마가 딸들과의 연을 먼저 끊으려는지

연락을 받지 않으신다

국제전화를 하면 받지만 카톡은 하지 않으신다

요즘 돈이 많은 사람들도 무료로 사용할 수 있는 카톡을 사용하지

비싼 요금이 드는 국제전화를 사용하지 않는다

남동생은 카톡 카톡하는 소리가 듣기 싫어 카톡 사용하기를 싫어한다지만 그건 핑게인것같다

엄마는 먼저 딸들과의 연을 끊고 싶어 하는 것같다

엄마는 점쟁이의 말을 맹신하시는 것같다

같은 집안의 며느리라 해도

할머니는 고모와 사이가 좋으셨고 

아들보다 딸과 지내는 것을 편안해 하셨다

서울에 올라오면 고모님댁에 자주 가시고 오래 머무르셨다

지혜롭지 못하고 싫은티를 내는 며느리보다 할머니를 환대해주는 고모님 댁을 편안해 하셨던 것같다

아버지와 열살 차이나는 고모와 아버지의 사이는 좋으셨다

고모는 삼남삼녀를 두셨는데 식구가 많다보니 할머니의 짐속엔 우리집보다 고모집에 가는 물건이 더 많았다 

엄마는 그것도 불만이었다

고모네에 가는 물건이 더 많다고

할머니와 친하게 지내지 못하면서도 할머니가 고모와 친한 꼴도 보지 못하셨다

딸들과 잘 지내서 나쁠게 무엇인지 모르겠다

내가 아이들을 낳았을 무렵 아버지가 편찮으셔서 엄마의 도움을 받지 못했다

하지만 나는 전업주부라 엄마의 도움 없이 아이들을 돌볼 수 있었다

나보다 3년쯤 후 아이들을 낳은 여동생은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라 엄마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

여동생이 일을 해 엄마가 출퇴근 하다시피 여동생의 집에 가 여동생의 아이들을 돌보셨던 것같다

어느날 엄마에게 밍크코트가 생겼는데 엄마가 사신 것인 줄 알았다

대기업 월급 사장인 고종사촌 형부가 고종사촌 언니에게 밍크코트를 두 벌이라 사주어 부러워해온 엄마라

갖고 싶어했던 밍크코트를 샀나보다 했다

재작년 한국에 갔을 때 엄마는 여동생이 아이들 돌봐준 값으로 밍크코트를 해 준 것이라 했다

진짜인지 아닌지는 모르겠다

그리고 옷장의 옷들도 모두 여동생이 해준 것이라 했다

그렇게 해 준만큼 받아갔겠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그렇게 돌봐준 여동생의 아이들이 보고싶다 했다

그러다 여동생과의 관계가 끊어진 탓인지 갑자기 여동생이 이기적이라고 욕한다

나도 하나 둘 사둔 명품 가방들이 모두 엄마에게 갔다

그런데 하나도 남아있지 않은 것으로보아 엄마가 그것들을 3년전 돌아가신 동생이모에게 준 것같다

나에게 상처를 주는 말을 하지만 나는 상처를 입지 않았다 엄마의 속을 알고 있으니까

엄마는 나르시시스트이고 나는 엄마의 스패이프 고트이다

엄마와 가까이 있을수록 엄마와 오래 있을 수록 엄마는 나에게 상처를 주는 말을 한다 

엄마에게 상처를 받지 않으려면 거기에서 관계를 끊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