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카테고리 없음

2023년 12월 18일 (2)

혼자 있는 것이 좋다.

남편과 결혼 후 분가해 가까이 살고 있는 아들 딸이 있어서인 것같다.

남편과 아들 딸 없이 달랑 혼자라면 

혼자 있는 것이 좋을까?

외로울지도 모르겠다.

가족이 있어서인지 외롭지가 않다.

어릴때는 밝고 사교성이 많은 성격이었다.

남녀차별이 심한 유교 집안이었지만

딸이라 집안에 대한 의무가 없어서인지

오히려 조부모님이나 아버지 친척분들이 사심없이 예뻐해 주셨던 것같다.

나를 어둡게 만드는 분은 엄마였다.

엄마의 열등감과 시기 질시로 나의 앞길을 막고

조부모님이나 아버지 집안 친척들로부터 받는 스트레스를 

나를 짓밟고 괴롭히는 것으로 풀었다.

나에게 언제나 부정적이었고 비난조였다.

늘 누군가와 비교하며 깎아내렸다

어린 나에게 엄마는 굉장한 파워를 가진 존재였다

하지만 내가 살려면 그런 엄마를 이겨내고 극복해야 했다.

작년 딸의 결혼으로 한국을 방문했을 때 만난 엄마는 하나도 달라진 것이 없었다

내 나이 65, 엄마 나이 90이다.

여전히 여동생과 비교하며 여동생네 아이들이 보고 싶다고 한다

우리 아이들은 보고 싶지 않다는 뜻일까

우리 아이들도 뭔가 눈치가 있는지 외가에 가기를 싫어 한다.

엄마와 여동생과는 사이가 좋았는데

재작년 추석에 여동생이 엄마와 싸웠다며 다시는 보지 않을 것이라 했었다.

그런 사실을 내가 모르고 있는 줄 아는 엄마는 

30년 전 여동생이 아이들을 낳고 일을 하게 되어 여동생네 아이들을 돌봐준 대가로

여동생이 밍크 코트를 해줬다며 이제와 자랑을 한다.

엄마의 밍크 코트가 그렇게 생긴 것인 줄 몰랐었다.

내가 아이들을 낳을 때는 아버지가 편찮으셔서

엄마는 아버지에게 신경을 쓰시느라 우리 아이들을 돌보아 줄 여유가 없었다.

그래서 나는 독박육아를 했는데 그것에 대한 섭섭함은 없다.

대가집 유모 손에서 자란 할머니는

유모없이 내가 직접 혼자 아이들을 키우고 살림하는 것을 보고 

요즘 세상이 망해 아이들을 유모없이 혼자 직접 키운다고 쯧쯧해 하셨다 

7 남매에 맏딸이셨던 엄마는 동생 돌보는 것이 싫으셨는지

아이 보는 것을 가장 싫어하셨다.

내가 때어났을때 강릉에 사셨던 할머니가

열 살된 분남이 언니를 서울 우리집에 보내 나를 돌보게 하셨다.

내가 어릴땐 집안에 엄마를 돕는 식모 언니들이 있었다.

나는 남의 손에 자라는 것도 남이 살림하는 것도 싫었다.

그래서 내 아이들은 내 손으로 키우고 싶었고

내 손으로 한 밥을 먹이고 내 손으로 살림을 하고 싶었다.

그래서 아이들의 돌 때를 제외하고 사람을 써 본 적이 없다

아버지의 자식들에 대한 사랑은 대단하셨다.

하지만 그 사랑이 지나쳐 자식들을 자신의 소유물처럼 여기고

당신 마음대로 자식들의 인생을 조종하셨다.

우리는 특히 오빠와 나는 마리오네뜨 같았다

아버지가 조종하는 마리오네뜨 인형같았다

사랑은 많으셨지만 독재적이고 엄격하셨다

그래서 우리의 선택권이 없었다

집안의 장손인 오빠에게는 더욱 엄격하셔서 오빠에게 자유가 없었던 것같다

사랑을 줄 줄도 받을 줄도 모르는 나르시시스트같았던 엄마의 사육 덕에

오빠는 비빌 언덕도 없었던 것같다

집안의 기대가 덜한 나는 오빠보다 나았지만

사춘기를 지나며 부모에게 소극적인 반항을 많이 했던 것같다.

부자 소리를 들었지만 나라 전체가 가난했던 시절이라

아들이 아닌  딸인 나에게 특별한 용돈이라는 것이 없었다

주면 주는대로 없으면 없는대로 살았다

엄격한 집안 덕분에 노는 것도 몰라 점심값 교통비만 들고 학교와 집만 다람쥐 체바퀴 돌듯 다녔다

놀 줄도 몰라 놀기 위해, 치장을 위해 적극적으로 돈을 버는 돈의 필요성도 몰랐다.

가진 것에 만족하며 가진 것에 맞추어 산 것같다.

북촌에 살아 고등학교때까지 학교를 걸어다녀 차를 타고 어디 먼데를 가 본적도 없고 

서울에서 태어나 서울에서 자랐음에도 서울을 모르는 서울 촌놈?이었다

오히려 방학때 지방에서 올라온 이종 사촌들에 이끌려 버스를 타고 이곳 저곳을 가봤던 것같다

하지만 사는 곳에 문화적인 곳이어서

돈이 생기면 인사동에 가 책을 사서 읽고 화랑에 들러 그림 구경을 하고

겨울에는 비원 잔디밭과 경복궁 경회루에서 스케이트를 탔었다.

주머니가 가난했지만 문화적으로는 충만해서 다른 아쉬움이 없었던 것같다

중 고등학교에 올라가면서 

독특한 집안 환경과 자란 환경으로 비슷한 친구 만나기가 어려웠던 것같다

국민학교 친구들이 가장 잘 맞았던 것같고 지금도 국민학교 친구들이 가장 많이 남아 있다

대학에 들어갈 때까지 남자를 사귀어 본 적도 없었고

미팅도 다섯 손가락 안에 들었다 

그러다 대학 연합 써클에 들어가 한 남자를 사귀게 되었다

ㄱ대학교 법학과 세 명이 친했는데 내가 좋아했던 친구는 ㄱ이었다

그러나 ㄱ은 ㅇㅎ여대 출신의 여자와 결혼할거라면서 나를 거절했다

꿩대신 닭이라고 해야 하나

같은 강릉 출신이라 우리 집안에 대해 알고 있던 ㅈ이 나에게 관심을 보였다 

집안의 부가 늘어나면서 코오롱에서 사장을 하던 고종사촌 형부가 

딸도 집안 재산의 반을 가질 권리가 있다며 우리 집안 재산을 탐냈다

아버지 보다 열살이 많은 고모는 일찍 결혼해 대기업 사장 사위에 검사 사위까지 있었다

나는 오빠는 아프고 동생들은 어린데 우리집을 지킬 똑똑한 사위가 있었으면 했다

ㅈ이 이성으로서는 좋았던 것은 아니었는데 똑똑함이 마음에 들었다

엄마 아버지가 마음에 들어 하실 줄 알았는데

엄마 아버지의 생각은 나와 달라

오빠가 아픈데 똑똑한 사위가 집안 재산을 빼앗아갈 것같았는지 

온갖 이유를 대며 맹렬히 반대를 했다

결국 ㅈ과 헤어지고 선을 두 번 보고 남편과 결혼을 하게 되었다

남편과 결혼후 남편은 미국 주재원으로 나가게 되어 미국으로 가게 되었는데

일년 후 아버지는 그 고종 사촌 형부와 사업을 시작해 일 년만에 부도를 내고 말았다.

나는 친정 재산이 얼마나 있다 얼마가 없어졌는지도 모르고 관심도 없었다

그런데 엄마 아버지는 내가 집안 재산이 탐이나 재산때문에 ㅈ과 헤어졌다고 

모든 잘못을 나에게 씌우신다

나는 ㅈ을 결혼하고 싶을만큼 좋아하지는 않았던 것같다

사귀었으니까 결혼을 해야지 라고 생각했었던 것같다

집안의 반대가 없었다면 결혼을 했을 것이다

그러나 행복하지는 않았을 것같다

남편의 백그라운드도 상당히 어둡다

나도 오빠때문에 어두웠었는데

어둠은 어둠에 이끌리게 되는것같다

결혼을 하고 난 다음에야 남자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이런 남자도 있고 저런 남자도 있구나

그러나 모두 그림의 떡이었다

나는 나로 내 인생을 살지 못하고 친정을 위해 희생을 했다고 생각했는데

친정은 나를 이용하고 토사구팽해 버렸다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엄마는 나에게 집안에 발도 들여 놓지 말라고 하고

아버지 빚이 상속된다며 상속 포기서를 받아갔다

어이없었지만

나에겐 남편도 있고 아들 딸도 있고 집도 있고 친정 없어도 아쉬울 것이 없었다.

친정에 뭘 달라는 소리를 해본 적도 없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돈때문에 다투고 싶지 않았다

오히려 돈을 차지한 엄마와 올케가 돈때문에 싸우고 왕래를 하지 않는다

내가 결혼을 하고 미국에 간 다음 해

오빠가 아프지 않았다면 결혼을 하지 않았을 중졸 출신에 가난한 집 여자를

엄마가 만만해 보였는지 며느리로 들였다

가난해서 돈보고 결혼을 했는지 올케는 돈독이 올라 돈밖에 모른다

40이 갓 넘은 오빠가 돌아가시자

오빠 이름으로 되어 있는 강릉집이며 선산을 모두 자기 이름으로 바꾸어 놓았다

엄마가 서울집을 남동생 이름으로 상속 증여 했는데

그 집이 얼마인데 하며 남동생의 서울집을 탐낸다 .

엄마 생일상 한 번 차려 본적이 없는 본 데 없는 여자이다

작년 서울에 가서 친정에 가보니 망가진 화장실 수리를 하지 않아 엉망인데다

도배도 언제 했는지 누렇고 엄마가 아픈신 이후 청소도 제대로 하지 않아

양말에 먼지가 하옇게 묻었다

아버지 돌아가시고 30년 넘게 돈 버는 사람없이 서울의 37평 집에 살고 있다면

그 집을 유지하고 살만큼 돈이 있다는 것인데 없는티를 내느라고 거지같이 하고 산다

나이 70, 90이 되어서도

엄마네나 올케네나 먹고 살만큼 돈이 있으면서

아직까지도 서로 돈달라고 돈돈하며 원수같이 사는 꼴이 우습다.

작년 엄마가 편찮아 병원에 입원을 했는데

엄마가 돌아가시면 돈과 집을 빼앗아 가려고 했는지

올케가 강릉에서 득달같이 올라와 며느리 노릇을 하는척 하려고 했었다

남동생이 집에 들어 오려는 올케를 경찰에 신고해 주거 침입죄로 경찰서에 갔었단다

남동생은 카톡을 하지 않는다

카톡 카톡 하는 소리가 듣기 싫어서란다

그것은 핑게고 국제 전화를 받지 않겠다는 뜻인 것같다

그래서 메일이나 문자를 보내도 응답이 없다

돈이 뭔지 돈때문에 부모 형제 자매 자식도 없다

아버지가 살아계셨다면 혼줄이 날 인간들이다

우리처럼 차라리 돈이 없는 것이 더 낫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는 쌓아둔 돈이 없어도 화목하게 잘 살아가고 있다

어릴때 읽은 백치 아다다의 휴유증으로 돈이 불행을 일으킨다는 돈에 대한 부정적 마음때문에

돈에 대한 욕심이 없는데 그 덕분에 부자가 되지 못하는 것같다

일하느라 고생하는 아이들을 보면 복권 일등에라도 당첨되어 아이들이 이곳에서 집 걱정 돈 걱정 하지 않고 몸도 추스리면서 건강도 챙기며 쉬어 가며 살게 해주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