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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12월 23일 금요일

일년 중 밤이 가장 긴 동지가 지났다.

낮이 가장 긴 하지가 지났을 때 아쉬움이 느껴졌었는데

동지가 지남으로 희망의 빛이 보이기 시작하는 것같다.

ㅈ대 학부 3학년으로 편입을 하면서 아버지는 나에게 욕심을 내기 시작하셨다

공무원으로 계시던 아버지는 새로 신설된 은행 창립 멤버로 옮기시면서

사업에 관심을 갖고 은행이 세들어 있는 빌딩에 있는 대기업 청년들을 보시고 사위 삼고 싶어하셨다 

대학을 졸업할 무렵 취업을 하려는 나를 그 회사에 취업시켜 주셨다.

대졸 여성 공채가 없던 때라 연줄 연줄 취업을 했는데

그 회사에 취업 청탁이 많았는지 디자인실이라고 만들어 놓고 직원을 뽑았는데 정작 일이 없었다

회사는 여자들이 결혼을 하면 떠날 것이라 생각해 투자를 하지 않았다

여자 열명이 할 일 없이 회사만 왔다 갔다 출퇴근을 해야 했다 

결혼을 하지 못하고 일년 이년이 지난 여자들은 히스테리를 부렸다

친구들은 좋은 회사에 다니는 나를 부러워 했지만

나는 회사 생활이 지옥같았다

회사를 그만두고 싶다 했더니

아버지는 청탁으로 힘들게 취업을 시켜주었으니 결혼을 하고 나오라 했다

그때는 여사원들이 입사를 할 때

결혼을 하면 그만둔다는 각서를 쓰고 입사를 했었다

결혼을 할 마음이 없었는데 그 회사를 나오기 위해 결혼을 하게 되었다

그래서 아버지에게 결혼할 사람이 있다고 ㅈ을 소개해 드렸더니

아버지의 나에 대한 계획이 어긋났는지 반대를 하셨다

나는 아버지의 소유물이라 아버지 뜻대로 해야 한다

마른 하늘에 날벼락처럼 ㅈ에게 큰 상처를 주고 헤어지게 되었다

ㅈ에게 준 상처는 나의 상처가 되기도 했다

ㅈ에게 상처를 주고 부귀영화를 누릴 마음이 없어 조금은 자학적으로 살지 않았나 싶다

나를 집에서 빨리 처분하고 싶었던 엄마 아버지는 결혼을 서두르셨다

아버지는 친구 자제분을 소개해 주셨다

집안 좋고 가족이 화목하고 형제 자매 사이에 우애가 깊다고 적극 추천하셨다.

어둠이 깊었던 나는 그 빛의 사람에게 끌리지가 않았다.

결혼을 거절하니 아버지는 뭐가 잘났다고 거절하냐며 나의 마음을 전하지 않아

다시 만나게 되었을때 아직 결혼할 마음이 없다고 직접 말을 해야 했다

남편은 아버지의 친구분 중매로 만났는데

남편에게서 어둠이 느껴졌고 그 어둠이 끌리게 되었다

학교에 다니면서 복학생들에게서 아저씨 냄새가 나서 싫었었는데

그 복학생들보다 더 나이가 많은 사람과 결혼을 하게 되었다

나는 남편이 어떤 사람이지도 모르면서 괜찮다고 했더니 결혼이 일사천리로 이루어졌다 

재벌집 조카라고 했지만

내가 부자집의 가난한 딸이었듯 남편도 재벌집의 가난한 조카였다

아무것도 없다는 것이 마음이 편했다

ㅈ과 헤어지고 부귀영화를 누리고 산다면 양심의 가책이 느껴질 것같았다

아버지는 속아서 결혼하는 것같다고 했지만 내가 속은 것은 없었다

내가 결혼할때 친정은 재산이 가장 많을 때였는데

엄마 아버지는 나에게 해 준 것이 없었다

남편은 이복형과 인천에 24평의 회사 아파트를 공동 소유하고 있었는데

이복 형은 그 당시 강남 아파트 평당 가격이 백만원일때

그 인천 아파트가 이천만원이라며 반 값인 천만원을 달라고 했다

아버지가 그 돈을 다주셨는지 안주셨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버지는 나에게 더 이상 줄 것이 없다고 친정에 더이상 달라는 말을 하지말라고 못박으셨다

나도 바랄 마음이 없었다

내가 해간 것이 없어 시댁쪽에서도 해 준 것이 없다

정작 속은 것은 부자집 딸인줄 알았던 내가 빈털털이로 시집와 실망한 남편이었다

그래서 돈을, 경제권을 자기가 쥐고 나에게 평생 인색하게 군다

나에게 인색했던 부모밑에서 자라 다시 인색한 남편을 만난 꼴이다

그래서 익숙하게 참고 견디며 살 수 있었던 것같다

그래도 신혼초엔 돈도 부모도 없이 고아와 같던 남편이

결혼으로 가정이란 울타리가 생기면서 안정감을 갖고 행복해했다.

결혼을 하고 주재원으로 미국 생활을 하던 일년 후

아버지가 고종 사촌 형부와 사업을 하다 부도가 났다는 소식을 들었다

친정이 잘 살아야 마음이 편하고 기를 펴고 살 수 있는데

친정이 사업으로 망했다는 소식을 들으니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내가 잘 살고 있어도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휴가를 받아 놀러를 가도 즐겁지도 좋지도 않고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주재원 생활을 끝내고 돌아오면서

주재원들의 반은 미리 준비한 영주권을 받고 미국에 남았고 반은 돌아왔다

주로 부모님을 모시는 장남들이 돌아오게 됐던 것같다

우리의 경우는 남편이 인종차별 심한 미국 생활을 좋아하지 않았고

나는 아버지가 걱정이 되어 돌아왔다

그동안 아버지는 폭삭 늙으셨고 쇠약해지셨다

건강이 안좋음에도 술과 담배로 사셨다

아이가 없던 나는 한국에 돌아와 아들 딸을 낳았고 

아버지는 딸의 돌까지 보시고 돌아가셨다

엄마는 강릉에 있는 오빠네는 아버지 임종 전에 미리 친정집으로 불렀으면서

나는 아버지 임종때 부르지를 않으셨다

지금 생각해보면 아버지의 돈의 존재를 알고 아버지를 안락사 시키신 것같다

아버지의 동의가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아이들이 어려 강릉 산소까지 따라가지 못한 나는 텅 빈 친정집을 지키고 있었는데

강릉에서 언니네와 무슨 말이 오갔는지

엄마는 강릉에서 서울 친정집으로 돌아오자마자

나에게 당장 친정집을 나가라며 다시는 친정집에 발도 들여놓지 말라고 호통을 치셨다

친정집을 지키고 있던 나는 갑자기 어이가 없었다

그리고 나에게 찾아와 아버지 빚이 상속된다며 상속 포기서에 사인을 받아갔다

상속 포기서를 쓴 사람은 나밖에 없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자마자 재산과 돈부터 챙기는 그들이 사람같지 않았다

그러면서 엄마는 사람들이 자기를 챙기고 위로하지 않는다고 불평을 했다

나는 엄마를 위로하느라 우리의 여름 휴가에 엄마를 모시고 갔었다

아버지가 살아계실땐 엄마의 미움을 독차지하면서도 엄마편을 들었었다

그런데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엄마에 대한 정이 똑 떨어졌다

엄마는 돈을 갖고 엄마가 가진 돈에 절을 하면 돈을 줄게 하는듯 하지만

엄마에게 잘해도 돈은 미끼일뿐 실제는 주지 않고

사람을 갖고 이용하고 장난을 칠 분이다.

자식들도 그 돈없이 잘 살고 있어 돈때문에 엄마에게 치사하게 매달릴 사람은 없다

나만 그런가?

강릉 올케는 돈달라고 엄마와 30년 넘게 징징대며 싸우고 있고 남동생은 엄마집을 빼았았고

여동생은 엄마와 돈갖고 다투다 의절을 했다

나는 돈 달라는 말도 돈갖고 싸우지도 않았는데 연락을 끊고 있다

그러면서 다들 외롭게 살고 있다

나는 쌓아놓은 돈은 없지만 아이들과 사이좋게 잘 살고 있다

아이들이 우애있게 자라게 하기 위해 아들 딸 차별도 하지않고

똑같이 해주려고 노력했고

특히 딸이 남녀 차별로 상처받지 않게 하기 위해 의식적으로 많이 노력을 했다 

나는 보수적으로 엄하게 틀에 갇힌 답답한 어린시절을 보내

아이들에게는 자유를 주고 싶었다

이민을 와 시작한 사업이 망해 돈이 없어 아이들이 일찍 아르바이트를 시작했지만 

그 돈으로 친구들과 먹고 마시고 노는 것에 쓰는 것을 막지 않았다

돈을 꽤 벌어 그 돈을 모으면 대학 등록금도 낼 수 있고

집값이 비싸지 않을 때라 몰게이지를 받아 집을 살 수도 있었을 것이다 

돈을 모으고 저축을 하라고 했지만 강제하지는 않았다

먹고 마시고 노는 것도 때가 있어 그 때를 놓치면 놀지도 못한다

나는 먹고 마시고 놀 줄을 모른다

그럴 돈이 없어서였다

하지만 결혼 후 없는 형편에도 작은 돈이라도 모으려 애썼는데

그 돈은 내 돈이 되지 못하고 애써 모은 돈이 허무하게 없어졌다

그 돈이면 세계여행도 갔었을텐데

놀아보지 못해 놀 줄도 돈을 쓸 줄도 모른다

그건 남편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남편과 나는 지루하고 재미없는 삶을 살게 되는 것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