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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12월 25일 월요일

금년 1월 남편과 나는 은퇴를 했고

코비드때 실직을 했던 며느리는 3년간 출산과 육아를 하며 집에 있다가

손녀를 어린이집에 보낼 때가 되어 

금년 4월부터 일을 다시 시작하였다.

아이를 어린이집에 보내려면 부부가 같이 일을 해야 정부 보조금 혜택을 받을 수 있어

겸사 겸사 일을 시작하게 되었다.

아들은 결혼 후 밴쿠버 다운 타운에 살다가

손녀를 낳을 무렵 우리집 근처에 좋은 가격의 투 베드룸 렌탈 콘도를 구하여 이사를 했다.

집 주인이 외국에 있어 3년 동안 렌트비를 올리지 않아 아들 혼자 버는 돈으로 생활을 할 수 있었다

4년째가 된 금년에야 30불 정도 올렸다

그에 반해 내가 살고 있는 콘도는 관리비가 기하 급수적으로 오른다

집 크기에 따라 다르지만 2024년 엘리베이터 수리비로 가구당 일년에 1200불 정도의 분담비가 나왔고

창문을 교체한다고 정기적으로 오른 관리비외에 한달에 50불을 더 내게 되었다

사우나와 실내 수영장이 있어 수영장이 없는 콘도에 비해 관리비가 많이 나온다

개인적으로 든 집 보험비도 인플레이션에 맞추어 해마다 많이 오른다

돈을 벌지 않아 들어 오는 돈은 한정되어 있는데 나가는 돈은 늘어난다

세금으로 주는 연금을 이렇게 저렇게 다 빼앗아 가는 것같다.

남편과 맨땅에 헤딩하듯 아무것도 없이 시작했지만

모든 것을 주신 하늘에 계신 분이 다 채워 주시리가 믿는다

어찌보면 무모할 정도로 낙천적으로 살았다

6년간의 주재원 생활로 모은 돈으로 상계동에 집을 마련했고

남편이 회사 출퇴근 교통 문제로 집과 직장이 가까워야한다는 이유로

아는 사람 하나 없는 의정부에 가서 10년을 살다

캐나다로 이민을 오게 되었다

이민은 보통 여자가 원해서 남자가 따라오는 경향이 많은데

우리집은 남편이 원해서 나와 아이들이 따라오게 되었다

인터넷 무료 사주를 보면

나를 제외하고 남편과 아들 며느리 딸 사위 손녀에게조차 역마살이 붙어 있다

다들 외국에 가서 살 팔자이고 태어날 팔자였던 것같다

나는 집순이고 외국에 대한 동경이 있었지만 특별히 여행을 좋아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조부모님이 강릉에 계셔 국민학교때 여름방학 겨울방학을 강릉에서 보내게 되었다

방학을 하면 오빠와 나는 강릉으로 보내졌는데

우리를 강릉으로 보내며 엄마는 홀가분하셨을 것같다

버스를 타면 멀미를 했던 나는 오빠와 둘이 서울역이나 청량리 역에서 밤기차를 타고 갔다

엄마와 아버지가 오빠와 나를 밤기차에 태워 보내면

아침에 할머니와 오촌 당숙이 강릉역에 마중을 나와 계셨다.

강릉에 갈 때는 오빠와 같이 갔지만 오빠는 서울로 금방 돌아 갔는지

오빠와의 추억은 강릉에 같이 간 기억밖에 없다 

서울에서 강릉까지 12시간 13시간 걸리는 완행 증기 기관차부터 타고 갔었다

여름에 굴을 지나면 석탄에서 나오는 그을음이 열린 창문으로 들어와 얼굴이 새까매져

잠시 쉬는 역에 있는 수도가에서 얼굴을 씻고 가기도 했다 

나만 혼자 한달 내내 조부모님댁에 머물렀었던 것같다

아버지가 여름 휴가로 강릉에 내려 오셨다 서울로 올라갈 때 따라 올라가기도 했다

조부모님댁에는 내 또래가 없어 심심했다

어린 육촌 동생들이 있었지만 서울에서 온 나를 왕따시켰던 것같다

물건너 외가집에 가면

한 살 많은 막내 외삼촌부터 같은 또래의 이종 사촌들이 있었는데

외가 사람들에게서도 왠지 모를 소외감이 느껴졌었다.

외가집에서 문제아 취급을 받던 둘째 외삼촌을 따라 강릉에 가게 되면 외가집으로 먼저 가게 되어

재미없고 심심한 조부모님댁에 가지 않으려 해서 조부모님은 나를 외가집에서 데려 오려고 애를 쓰셨다

서울에선 학교 근처의 만화 가게도 가지 못하고 집과 학교만 오가는 소심한 모범생?이었던 나는

강릉에 가면 할머니가 주시는 약간의 용돈으로 만화 가게에 가 만화를 실컷 볼 수 있었다

친가엔 나보다 여섯살 많은 당시 여고생이었던 육촌인 금주 언니가 있었는데

그 언니가 영화를 좋아해서 내가 강릉에 가면 나를 데리고 다니며 강릉에 있는 영화관 네 곳을 돌며

조조 상영부터 마지막 상영까지 하루에 네 편의 영화를 보여주었다

서울이라면 미성년자 관람금지라 볼 수 없는 영화도 강릉에서는 아무 제재없이 들어가 볼 수 있었다

그 언니가 영화에 대한 눈을 뜨게 해 주었던 것같다

언니가 없던 나는 그 언니를 몹시 따랐고 그 언니도 나를 친동생처럼 아껴주었다

그런데 내가 고등학생이던 무렵 그 언니가 오빠를 저주한다는 엄마의 이간?으로 그 언니와 멀어지게 되었다

작년 강릉에 갔을 때 올케 언니도 금주 언니를 좋아하지 않는다고 했다

할아버지는 오형제에, 막내로 고명 딸인 왕고모가 계셨다

할아버지는 맏이로 집을 지키셨고

둘째 세째 네째 다섯째 할아버지들은 결혼을 하면서 재산을 나누어 받아 분가를 하셨다

개화파에 얼리 어답터였던 집안 전통에 따라

둘째 세째 할아버지는 백화점을 열어 사업을 하셨지만

시대를 너무 앞섰는지 사업도 망하고  페니실린도 없던 시대라 병을 얻어 일찍 돌아가셨다

반항기가 있던 둘째 할아버지는 첫부인과 사별을 하고 못생긴 기생과 결혼을 하셨다

남편은 기생이 어떻게 못생길 수가 있느냐고 하는데 그 자손들을 보면

할머니를 닮은 분들과 할아버지를 닮은 분들을 통해 알 수가 있다

둘째 할아버지의 자손들은 고아가 되어 큰집인 조부모님댁에 들어와

결혼을 하고 아이들을 낳고 서울에 있는 외아들인 아버지를 대신해 조부모님을 모시며 사셨다 

그러데 한이 많아 마음이 삐뚤어졌는지 우리에게 참 못되게 굴었다

세째 할아버지 자손들은 서울로 올라와 우리집과 가깝게 지냈고

서울의 한 신문사의 기자셨던 네째 할아버지는 평양인가 출장을 가셨다가 병으로 객사를 하셨다 

네째 할아버지도 한번의 상처후 서울 여자와 재혼을 하시고 딸 둘을 낳으셨다

야무진 네째 할머니는 서울에 남겨진 집을 바탕으로 딸 둘을 대학교육까지 시키셨다

다섯째 할아버지는 출판사를 하셨는데 역시 병으로 일찍 돌아가셨다

내가 다섯살 때인가 국민학교에 들어가기전 막내 할아버지의 병문안을 갔던 기억이 있다

쾡한 눈으로 바라보시던 그 얼굴이 아직도 생각이 난다

다섯째 할아버지의 자손들도 조부모님이 챙기셨다

큰 아들이었던 영찬이 아저씨는 고등학교무렵 서울 우리집에 와서 학교를 다녔고

대학을 졸업하고 취직을 하고 우리집에서 분가를 한 후

강릉에 있던 둘째 아저씨가 ㅅ공전을 마치고 서울에 있는 ㅈ공대에 편입해 영찬아저씨와 합가를 했다

강릉집에 있던 막내 당고모도 서울 우리집으로 와 양재학원을 다닌 후 명동에 있는 양장점에 취직을 했다

나보다 여섯살 많았던 영자아재는 고아 소리를 듣기 싫어서였는지 학교가기를 싫어했다고 한다 

아버지는 영자아제 공부를 시키지 못한 것을 안타까워했고

나에게도 양재학원을 다니고 취직을 하라고 하셨다

영자아재에 대한 미안함때문인지 나에게 이년제 대학을 나와 시집을 가라고 하셨다

고아가 된 다섯째 할아버지 자손들의 한도 깊었다

같이 살면서 오빠의 도시락에는 계란이 들어갔는데

자신들의 도시락에는 계란이 없었다는 사소한 차별받은 설움만 컸던 것같다

그래서 속으로 오빠를 저주했는지도 모르겠다

영찬이 아저씨는 결혼후 미국으로 이민을 가 사업으로 성공을 하셨다

자신들을 돌보아준 엄마 아버지에 대한 고마움은 있는데

자신들의 한을 오빠에 대한 시기 질시와 분노로 푸는 것같다

명절에 전화로 인사를 하면 엄마에 대한 궁금함은 있는데

오빠나 오빠의 아들들에 대한 관심은 없다

그들에 대한 관심이 없다고 냉정하게 말을 한다

자신의 아버지가 겨우 40이 넘어 돌아가셨다고

네째 할아버지가 자신의 성공을 못보고 일찍 돌아가신 것에 대한 아쉬움의 한탄을 하신다

오빠도 겨우 40넘어 돌아가셨는데.

둘째 할아버지 자손들도 오빠가 아파 마음 아픈 집에 와서

둘째 아저씨는 아버지에게 요구한 것이 들어지지 않았는지

뒤에 와서 내가 듣는지 안든는지 생각도 없이 2세를 보자며 화를 내며 씩씩 거린다

아버지와 우리가 희생하며 그들을 돌보아 주려고 최선을 다하는데도

그들은 우리를 저주하며 은혜를 원수로 갚는다

정말 지긋 지긋하게 느껴졌었다

그런 그들의 마음을 아는지 모른는지 아버지는 그들을 위해 무어 하나 더 해주지 못해 안타까워 하셨다.